지난 6월 23-4일 양일간 한양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에서는 국제 워크샵 Science, Technology, and Modern Dictatorship in Asia (과학, 기술 그리고 아시아의 근대 독재)가 열렸다. 미국, 타이완, 인도네시아 그리고 한국 총 4개국에서 과학기술과 아시아의 독재를 연구해온 학자 총 10명이 참가한 이 학회는 20세기 독재체제가 근대로의 정상적 궤적에서 이탈한 예외적 현상이 아니라 근대화/발전을 향한 대중적 열망을 전유하고 이의 효과적인 실현을 통해 체제의 존립 근거와 정당성을 확보해왔다는 점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조직되었다. 과학과 기술의 생산과 활용은 한편으로 사회개조, 근대화 및 발전에 관한 당대의 지배적 상상에 의해 영향 받았으며, 다른 한편으로 이러한 상상을 (재)생산, 유지하고, 물질적으로 구체화하는데 있어 핵심적 역할을 수행해왔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 그 주요 목적이었다.
먼저 23일에는 캘리포니아 폴리텍 대학의 왕주예 교수가 (Zuoyue Wang) 미국에서 교육받은 1300여명의 중국 과학자들이 중국의 문화혁명기를 통하여 어떻게 중국의 핵개발 등 과학 전반에 영향을 끼쳤는지를 분석하였다. 이어서 타이완 국립대학의 장구오후이 교수는 (Kuo-Hui Chang)는 타이완 엔지니어들이 국가 중심의 테크노 국가를 구상했던 계획이 실패한 과정을 밝혔다.
이어서 오후에는 미네소타대학의 히로미 미즈노(Hiromi Mizuno) 교수는 만주를 중심으로 중화학공업을 중시했던 일본 제국이 1945년 이후 전후 상황에서 만주의 기억을 처리하는 복잡한 양상에 관하여 흥미로운 발표를 개진하였다. 이어서 아리조나 주립대의 애론 무어 교수(Aaron Moore)는 1945년 이후의 일본이 아시아지역 개발에 미쳤던 영향을 광범위하게 조사하여, 아시아지역 개발의 양상이 얼마나 식민지적 혹은 제국적 연관을 가지고 만들어졌는지에 관하여 발표했다.
24일에는 남한과 북한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개발독재의 양상과 과학기술의 연관성에 관하여 발표들이 이어졌다. 먼저 한양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의 김상현 교수는 남한에서의 과학기술 개발과 독재의 연관성을 개괄하며, 가치중립적으로 보이는 과학기술이 얼마나 독재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는지 발표하였다. 이어서 한양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의 김청강 교수는 남한의 박정희 시기 만들어진 영화 <대괴수 용가리>와 과학-기술의 사회적 상상이라는 개념을 이용하여, 당시 과학기술에 관한 대중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이것이 핵개발이나 우주개발과 같은 냉전과학의 유포와 얼마나 깊은 관련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이어서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데프나 주르 (Dafna Zur)교수는 한국전쟁 이후 북한에서 과학 지식이라는 범주가 어떻게 어린이 잡지와 문학에 투영되고, 문학과 잡지의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중요한 장치가 되는지를 면밀하게 분석하였다.
마지막으로 미국 오클라호마대학의 수잔문 (Suzanne Moon) 교수와 노스웨스턴 대학 카타르 캠퍼스의 안토모신 교수(Anto Mohsin) 는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체제 아래의 과학기술에 대해 발표했다. 수잔문 교수는 1970-80년대를 중심으로 인도네시아의 “자주”개념이 어떻게 인도가 하이-테크의 길을 가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밝혔고, 안토모신 교수는 1945년 이후의 인도네시아의 개발 양상과 국가 정책의 관계에 대해서 발표했다.
전체적으로 이 국제 워크샵은 개최의 의도가 분명했던 만큼,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아시아의 독재와 과학-기술의 역할에 관해 심도 깊은 논의가 이루어져 성공적으로 마쳐졌다고 평가할 수 있을 듯하다. 20세기 독재체제의 과학과 기술에 관한 이제까지의 논의가 나치 독일, 스탈린 시기 소련 등 주로 유럽의 독재체제에 집중되어 왔던 것에 반해, 이 워크샵은 아시아의 사례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의미 있었다. 이번 학술회의의 논의를 통해 중국의 모택동 체제, 일본제국, 대만의 장개석 체제, 남한과 북한의 독재체제,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와 수하르토 체제 등 아시아의 독재 혹은 권위주의 체제를 본격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독재, 민주주의, 1945년 이후 국가체제에 관해서 앞으로도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함을 절감할 수 있었던 워크샵이었다.
작성자: 김청강 HK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