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30일에서 12월 2일까지 3일 간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에서는 국제학술회의 <트랜스내셔널 인문학: 도전과 전망 (Transnational Humanities: Challenges and Prospects)>이 개최되었다. 역사학, 문학, 문화연구를 비롯한 국내 인문학 분야에서는 ‘민족’과 ‘국가’를 본질화하는 ‘방법론적 민족주의’와 그에 기반한 국민국가 패러다임이 상당한 힘을 발휘해왔다. 비교역사문화연구소는 2008년 인문한국(HK) ‘트랜스내셔널 인문학’ 사업을 시작한 이래 ‘민족’과 ‘국가’ 범주를 지속적으로 문제화하는 ‘트랜스내셔널 관점’의 정립을 추구함으로써 기존 인문학의 국민국가 패러다임은 물론 분석단위를 ‘민족’과 ‘국가’의 경계 밖으로 확장할 것을 주장하면서도 이들 범주 자체를 문제화하는 데는 소극적이었던 글로벌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노력해왔다. 이번 학술회의는 HK ‘트랜스내셔널 인문학’ 사업의 종료를 앞두고 지난 10년 간 사업단의 연구 및 학술활동 성과를 되돌아보는 동시에 앞으로의 과제와 도전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이번 학술회의는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구성원들이 중점적으로 연구해온 주제들을 반영하여 “트랜스내셔널 역사와 문화: 개념적 고찰(Transnational History and Culture: Conceptual Reflections)”, “공간, 문화와 탈식민성(Space, Culture, and the Postcolonial)”, “트랜스내셔널 관점에서 본 근대화와 발전(Modernization and Development in Transnational Perspectives)”, 그리고 “젠더, 섹슈얼리티와 트랜스/내셔널리티(Gender, Sexuality, and Trans/Nationality)”의 네 세션으로 구성되었다.
기조 세션이라 할 수 있는 “트랜스내셔널 역사와 문화: 개념적 고찰” 세션은 호주국립대 Tessa Morris-Suzuki 교수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윤해동 교수의 두 발표로 진행되었다. Morris-Suzuki 교수는 첫 번째 발표에서 일본의 공상적 사회주의 ‘아타라시키무라(new village)’ 운동에 관한 분석을 통해 국민국가 경계 안으로 귀속될 수 없으며 동양/서양, 전통/근대 등의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서는 트랜스내셔널 정치적 사상과 실천의 움직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 주었다. 이어진 윤해동 교수의 발표는 동아시아 근대의 식민성을 보다 온전히 이해할 수 있기 위해서는 근대의 형성이 국민국가 내부의 정치, 경제, 사회적 질서 구축과 연결되는 과정 뿐 아니라 이들이 다시 지역적 혹은 전지구적 질서와 트랜스내셔널하게 상호작용하는 과정 또한 검토해야 함을 역설하였다.
“공간, 문화와 탈식민성” 세션에서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트랜스내셔널 인문학 접근을 시도하는 네 편의 문학 및 문화연구 발표가 이루어졌다. 먼저 미국 마이애미대 영문학과의 Anita Mannur 교수는 미국과 분쟁 중에 있는 나라들의 음식을 판매하는 테이크아웃 레스토랑 Conflict Kitchen의 사례 분석을 중심으로 요리에 관한 사회적 인식과 이해가 국민국가 패러다임을 넘어 제국, 영토성과 젠더 이슈를 재검토할 수 있는 트랜스내셔널 공간으로 재개념화되고 분석될 수 있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제시하였다. 이어 한양대 영어영문학과의 윤성호 교수는 아시아계 미국문학 작품들이 ‘이동성(mobility)’의 문제를 트랜스내셔널하게 표상하는 다양한 방식이 미국의 지배적인 공간적 상상에 어떻게 균열을 일으키고 있는지 면밀하게 추적하였다. 비교역사문화연구소의 이창남 교수는 유럽으로 시선을 옮겨 1920-30년대 프랑크푸르트 신문에 게재된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에세이와 칼럼들을 소재로 급속한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던 당시 베를린 직장인들의 초국가적이고 초계급적인 문화적 유목을 고찰하였다. 영국 런던대 SOAS 고고미술사학과의 강재호 교수는 1988년 서울 올림픽의 개최를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계기로 활용하고자 했던 한국의 군사정권이 글로벌 도시로서의 서울을 민족주의적으로 홍보하는 과정에서 코스모폴리타니즘을 표방한 백남준의 미디어아트를 적극 활용하고 보급하는 역설적 상황을 분석하였다.
“트랜스내셔널 관점에서 본 근대화와 발전” 세션에서는 기존 인문학 연구들이 다분히 주어진 것으로 또한 국민국가 단위로 작동하는 것으로 전제해 온 ‘근대화’와 ‘발전’을 특정한 역사·사회적 맥락에서 그러나 트랜스내셔널하게 형성된 담론, 지식과 실천으로 맥락화하는 네 편의 발표가 이어졌다. 미국의 테네시강 유역개발 사업 모델이 인더스와 메콩강 개발에 적용되는 과정을 분석한 네덜란드 마스트리히트대의 Vincent Lagendijk 교수는 이 과정이 단지 미국 개발 모델의 전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은행, 유엔, 그리고 지역의 다양한 행위자들이 연루되는 트랜스내셔널 네트워크를 경유하여 사뭇 다른 내용의 개발 모델이 대두되는 과정이었음을 강조하였다. 성신여대 사학과의 오경환 교수는 냉전이 본격화되던 시기 미국에서 지역학으로서의 동아시아학이 형성된 지성사적 배경을 파슨스의 구조기능주의 근대화론과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의 김종태 교수는 종종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져 온 한국, 중국, 대만과 일본의 발전주의 담론을 비교하고 이들이 각기 다른 민족정체성과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음을 역설했다. 이어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김상현 교수의 발표는 박정희 정권 기간 근대화와 발전에 관한 지배적 인식에 도전을 제기했던 진보적 기독교 그룹의 ‘인간화’ 담론이 세계교회협의회 등 국제적 에큐메니컬 조직과의 트랜스내셔널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된 것임을 보여주었다.
“젠더, 섹슈얼리티와 트랜스/내셔널리티” 세션에서도 네 편의 발표가 진행되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샌디에고 역사학과의 Todd Henry 교수는 정신의학자 한동세의 글을 분석한 발표에서 비규범적 섹슈얼리티와 젠더 변이에 관한 그의 담론이 미국에서 습득한 근대적 정신의학 개념틀에 기반하면서도 한국의 민족적 특수성을 이성애 가부장제와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권위주의 개발국가의 도덕적 하부구조와 공명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충북대 사회학과의 박정미 교수는 주한미군과 한국인 매춘부에 대해 다르게 시행된 미군과 한국 정부의 성병통제 정책을 세밀하게 분석함으로써 한국 기지촌을 트랜스내셔널 생명정치와 젠더정치가 작동하는 장소로서 재조명하였다. 미국 럿거스대 아시아언어문화학과의 Suzy Kim 교수는 유사한 플롯을 지닌 북한과 중국의 혁명가극 “꽃 파는 처녀”와 “백모녀”를 비교하고 사회주의 세계에서 여성 문제를 다루는 다양한 전략들과 그로 인한 상이한 여성성의 형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마지막으로 비교역사문화연구소의 홍양희 교수는 1930년대 식민지 조선에서의 족보 편찬 증가가 한편으로 총독부 권력이 확립한 가족제도에 의해 부계 혈통성과 계승성이 더욱 공고화되었음을 반영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가족이라는 법적 단위를 균질화한 총독부의 가족제도가 양반으로의 신분 상승 욕망을 뒷받침하는 물적 토대를 제공한 것과도 맞물려 있다는 분석을 제시했다.
각 세션의 발표 이후에는 지정 토론자 및 청중들과의 열띤 토론이 이어졌으며, 마지막 세션이 끝난 후에는 박찬승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의 사회로 종합토론이 진행되었다. 다수의 참석자들은 이번 국제학술회의가 다양한 주제들을 일국적 시각을 넘어 분석한 발표들을 함께 배치함으로써 트랜스내셔널 관점에 관해 보다 심도 깊은 논의가 가능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다만, 트랜스내셔널 접근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또 실제 분석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의 문제에 이르러서는 여전히 적지 않은 이견들이 존재했다. ‘트랜스내셔널’이라는 용어를 광범하게 활용하고 있는 국제정치학 등 사회과학 분야의 많은 연구들이 이를 ‘민족’과 ‘국가’ 범주를 문제화하는 관점이나 접근으로서보다는 국민국가의 경계를 횡단하는 현상과 과정을 기술하는 수식으로 여기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독자적인 트랜스내셔널 접근의 발전과 유지에 어려움을 주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참석자들은 이번 국제학술회의를 통해 인문학에서의 트랜스내셔널 관점의 중요성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으며 종합토론에서 제기된 비판적 논의들은 그와 같은 트랜스내셔널 관점의 심화를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는 점에 인식을 같이 했다.
작성자: 김상현(HK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