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내셔널 인문학 연구는 어디쯤 가고 있을까. 1990년대 한국사회에 포스트모더니즘이 번역되면서, ‘특수성’을 강조한 민족주의와 ‘보편성’에 입각한 근대주의를 극복하려는 비판적 사유가 동시에 확장됐다. 그 흐름에 따라 2000년대에는 ‘트랜스내셔널’시점이 확보되고, 자기동일성의 팽창이 아닌 ‘혼종적 정체성’에 주목하는 시선이 넘쳐났다. 이제 2010년대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실천되고 있는 트랜스내셔널 연구를 인문학의 전통 안팎에서 섞어내고 묶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RICH)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을 아젠다로 삼고서 벌이는 HK연구활동이 주목된다.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의 가능성
지난달 25일 한양대에서 있었던 RICH의 학술대회 ‘이중언어작가-(근)현대문학의 트랜스내셔널한 기원을 찾아서’는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의 체계화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테마였다. 흔히‘근대문학’은 국민국가 및 국어의 정립과 궤도를 같이 하는 것으로, 자국어로 쓰인 ‘민족문학’으로 인식됐다. 때문에 식민지기 한국인들의 일본어 글쓰기를 비롯해,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작업한 이중언어작가들의 작품은 민족문학의 주변에서 민족문학의 훼손과 민족의 곤란을 증언하는 위치에 놓여 왔다. 이번 학술회의는 그런‘민족문학’의 확정성을 내파하는 시도로서, 다중적 언어정체성을 지닌 이중언어작가들을 검토해 근현대문학의‘트랜스내셔널한 기원’을 추적하려는 것이었다.
식민통치와 노동이주에서 비롯한 다양한 이중언어 현상들을 만날 수 있었기에 일본연구자인 필자에게도 유익한 회의였다. 한국-일본의 경계에서는 이광수, 그리고 새로 발굴된 김진섭과 무명씨의 일기에 대한 분석(황호덕 성균관대 교수, 「일본어와 수양, 근대 한국문학의 조건」)이 이뤄졌다. 그 밖에, 터키-독일/ 이슬람-기독교/ 독일인-유태인이 만나는 삼중의 경계에서 레싱과 세노작의 소설에 대한 분석 (최윤영 서울대 교수, 「위험한 삼중주」), 알제리-프랑스의 경계에서 활동하는 앗시아 제바르의 자서전 연구 (이송이 한국해양대 교수,「혼종적 정체성과 불가능한 자서전」), 인도-영어 문학으로명성을 떨친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과 정치에세이 (이창남 한양대 교수, 「이중언어 글쓰기와 트랜스내셔널 리터러시」)를 다룬 발표가 이어졌다.
2부에서는 독일낭만파가 칭송한 휄덜린의 언어를 그리스 고전의 ‘서투른’ 번역과 결부된 혼성성의 산물로 바라보는 연구(연세대 A. 아들러 교수, 「휄덜린, 국민문학과 그리스 단일 언어주의의 신화」), 그리고 인과율의 스토리를 벗어나서 부조리를 조율하는 새 언어형식을 빚어낸 작가 사무엘 베케트를 통해 아일랜드/영어-프랑스어의 틈새에서 배태된 혼종성의 문학적 생산성을 보여주는 연구(연세대 K.S. 왈쉬 교수, 「혼돈의 조율 - 베케트, ‘워드싯’그리고 형식의 이슈들」) 발표가 있었다.
근대문학을 일종의 트랜스내셔널한 과정에서 형성된 것으로 재고해 보는 논의는 세계사의 시공간 및 글쓰기의 여러 형식을 가로질렀다. 유럽과 아시아, 18세기 말과21세기 초를 넘나들며 이중언어 글쓰기에 대한 다양한 정보와 해석의 틀이 제공됐다. 이중언어 구조는 민족어의 경계만이 아니라, 글쓰기의 형식(일기의 공식어와 사적 언어, 소설의 지문과 대화)에도 내포돼 있다. 민족문학의 계보 안에서도 이중언어(고전의 민족어/현대문으로의 번역)가 존재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전 지구화과정에서 ‘기원’은 다문화의 혼종적 정체성들 속으로 옮겨갔다. 이중언어 안에는 주류와 비주류의 권력운동이 꿈틀대고, 주류의 언어로 비주류의 목소리를 내는 이중언어작가들의 실천적 행위도 돋보인다. 이중언어 현상에서 다양한 트랜스내셔널의 가능성들을 엿볼 수 있는 알찬 기획이었다. 그러나 과연 이중언어 연구가 역사적으로 축적된 민족문학론의 다층적 체계를 전복시킬 수 있을까. 근현대문학의 ‘트랜스내셔널한 기원’을 논하려면 각각의 국민문학론을 비집고 들어가 더 많은 혼종성의 흔적을 찾아내고 ‘기원’을 말하는 방법을 다듬어야 할 것이다.
이번 학술대회에서 ‘기원’은 민족문학사와 세계문학사의 계보에 정초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다면 ‘트랜스내셔널한 기원’은 어디에 있는가. ‘트랜스내셔널’이란 운동성이 ‘기원’이란 시작점을 수식하는 순간에 ‘기원’은유동성을 띤 생성에너지가 된다. ‘기원’은 과거와 현재의 다양한 글쓰기 및 번역 과정에 산재하며, 중심과 주변에 연루된 ‘언어-권력’, 타자들의 우발적 만남 속에서 그 위상과 재현의 방식을 변화시킨다. 이리하여 빅뱅의 폭발 에너지처럼 지구의 모든 존재와 만남들에서 ‘기원’은 ‘흔적’으로 남는다.
초국적 권위와 질서에 흠집내기?
그렇다면 근현대문학의 ‘트랜스내셔널한 기원’찾기가 ‘국민문학의 다양한 기원’을 채색하고 보완하게 되는 위험성은 없을까. 최윤영 교수의 발표는 민족문학론과 트랜스내셔널한 기원 찾기의 ‘위험한 친족성’까지 암시하고 있었다. 타자와 이교도에 대한 관용조차도 동화와 포섭으로 흘러가고, 평등과 박애의 계몽이성은 경쟁윤리와 불평등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알제리의 프랑스어 여성작가로서 프랑스 한림원 회원으로 임명된 제바르, 600만부 베스트셀러 작가로 미국의 방송에도 자주 초청되는 인도여성 로이가 바로 선의의 경쟁에서 성공한 소수자이다.
그런데 지구의 모든 존재 속에 ‘기원’이 기입돼 있다면, 인문학은 빅뱅의 더 많은 흔적·생명체를 배려하는 힘이어야 하지 않을까. 학술대회를 기획한 이창남 교수는 초국적 권위와 질서에 흠집과 균열을 내는 안티테제로서의 이중언어 글쓰기, 모방과 전복이라는 이중적 전략을 구사하는 ‘트랜스내셔널 리터러시’를 읽어내고자 했다. 초국가적 자본주의 다문화사회에서 이중언어 능력은 정치·경제적 경쟁력이다. 이중언어 능력은 타자간의 쌍방향적 소통에 기초해 윤리적 삶을 배가하는 힘이 될 수 있다. 이중언어의 초국가적 지식능력은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을 전 지구적 삶의 문제로 연결시키고 윤리적 삶의 가능성을 공유하게 만드는 시작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