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 종족, 인종 등 집합적 정체성의 형성 혹은 국민국가의 건설 과정에서 ‘과거’의 지식과 재현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왔다는 점은 널리 인정되고 있지만, 이러한 과정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은 주로 관련 지식 주장의 진위 여부에 대한 실증적 고찰이라는 차원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비교역사문화연구소는 2014년 2학기부터 2015년 1학기까지의 기간 트랜스내셔널 인문학 콜로키움의 대주제를 “Unimagining the Past”로 정하고, 그와 같은 기존 연구의 한계를 넘어 과거에 관한 지식과 재현의 정치를 보다 맥락적이고 심층적으로 검토하는 새로운 시각과 연구성과들을 소개해왔다. 2015년 4월 30일에는 이 시리즈의 네 번째 강좌이자 제28회 콜로키움을 개최하고 중국현대사 전공자인 미국 Stanford대 사학과의 토마스 뮬라니(Thomas Mullaney) 교수를 초청하여 논의를 이어갔다. 토론자로는 이화여자대학교 국제학부의 진세정 교수와 비교역사문화연구소의 김상현 교수가 참여하였다.
뮬라니 교수는 그의 최근 연구서 Coming to Terms with the Nation: Ethnic Classification in Modern Chin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1)에서 1954년 중국의 ‘민족식별(民族識別) 사업’에 관한 흥미로운 지성사 연구를 제시한 바 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이후 중국은 1953년 전국적 인구조사를 실시하고, 그 과정에서 소수민족 집단에게 ‘민족등기(民族登記)’를 하도록 한다. 그 결과 400여개의 소수민족이 등록되었는데, 제1차 전국인민대표대회를 앞두고 각계각층의 대표를 선발해야 했던 중국 정부로서는 수용하기에 너무 많은 수였다. 이에 역사학, 민족학, 사회학 등의 전문가들과 공산당 관료들로 구성된 ‘민족식별 사업단’이 구성되고, 이들은 역사, 언어, 풍속 등에 관한 조사를 바탕으로 38개의 공식적인 소수민족 범주를 분류해낸다. 뮬라니 교수는 이러한 분류가 기초한 특정한 이론과 지식이 채택되고 활용되는 과정을 분석함으로써 근대 국민국가의 대두와 종족 및 민족 정체성의 형성에서 인문학·사회과학이 차지한 다층적·다면적 역할을 비판적으로 재조명하였다.
‘Unimagining Ethnicity in China: The Constitution of Minority Identity after the Ethnic Classification’라는 제목으로 진행된 이번 강좌에서 뮬라니 교수는 논의의 지평을 한 단계 넓혀 ‘민족식별 사업단’ 이후 공식화된 소수민족 범주가 유지되고 실질적 정책의 토대로 작동할 수 있기 위해 이들을 규정하는 역사, 언어, 풍속 등의 표준적 형태를 구축하는 일련의 국가주도 프로젝트들을 분석하였다. 특히 새롭게 발굴된 사료에 기반하여 1950년 중후반 소수민족의 언어를 둘러싼 중국의 조사 작업과 관련 정책을 세밀하게 검토하였는데, ‘표준적 소수민족 방언’을 결정하고 창출하는 과정이 한 편으로는 전문적인 언어학적 논리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당 관료, 인문학·사회과학 전문가, 소수민족 엘리트들의 복잡한 상호작용 속에서 이루어진 매우 정치적인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이번 뮬라니 교수의 콜로키움에는 한양대 내외에서 50여명의 연구자와 학생들이 참여하여 성황을 이루었으며, 강좌와 지정토론자의 코멘트 이후에도 한 시간 넘게 청중들의 질문이 이어지는 등 열띤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작성자: 김상현 HK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