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이 콜로키움의 대주제가 “트랜스내셔널 관점에서 본 ‘제국’”이라고 해서, 이에 호응하기 위해 소주제를 “이상과 현실의 공존; 漢 帝國과 ‘中國’의 사이”로 설정했다. 여기서 말하는 ‘漢 帝國과 中國의 사이’란 곧 漢代에 邊郡이 설치된 지역을 말한다.
鹽鐵 논쟁 이후, 중국인들은 이상과 현실을 일치시키려는 武帝 시대의 노력을 포기하는 대신, 이상과 현실의 거리를 자신의 역량에 맞추어 조절, 접근시키려 노력하였다. 이상과 현실을 공존케 하려 한 漢代 중국인의 노력은 中國과 夷狄의 관계 설정, 특히 중국이 이적을 지배하는 邊郡 체제에서 가장 잘 드러났다. 무제 시기의 중국인들은 왕성한 군사 활동을 통해 빼앗은 匈奴의 영토와 南越과 朝鮮의 故地 및 西南夷 등 중국 주변의 여러 夷狄의 거주지에 수많은 郡縣을 설치하여 漢 帝國의 영토를 크게 확장했는데, 漢代에는 이처럼 夷狄이 郡縣化를 통해 中國 국가의 영토 안으로 편입되는 과정을 ‘內屬’이라 불렀다. 그러나 염철 회의 이후 중국인들은 원래 中國에 설치되었던 郡縣을 內郡이라 부르고 중국 밖 夷狄의 영역에 설치된 이 새로운 군현을 外郡 혹은 邊郡이라고 부르며 각각 다르게 인식했다. 특히 염철 논쟁에 참여한 賢良과 文學들은 內郡을 ‘中國’이라 부르고 邊郡은 ‘夷狄’으로 간주하여, 같은 漢 제국의 군현인데도 ‘중국’과 ‘이적’으로 분별하였다. 漢 제국의 영토 범위와 ‘중국’의 범주가 일치하지 않아, ‘漢’ 국가와 ‘中國’은 별개의 개념으로 구별된 것이다. 무엇보다도 염철 논쟁 이후의 중국인들은 內郡과 邊郡의 운영 체계를 철저하게 분별하였다. 郡縣이란 군주가 官僚를 파견하여 人頭稅와 徭役, 兵役 등을 수취함으로써 인민을 직접, 개별적으로 통치하는 제도적 수단을 말하는데, 원래 中國에 설치된 內郡에서는 이러한 원칙이 관철되었다. 그러나 염철 논쟁 이후 邊郡에서는 인두세와 요역의 수취 대신에 집단적 朝貢이 이뤄지고 병역의 징발 대신에 집단적 군사 협조만 가능하였다. 무엇보다도 변군의 원주민은 漢의 황제가 임명하여 파견한 지방관에 의해 통치되지 않고 사실상 한의 황제에 의해 ‘冊封’된 君長에 의해 지배되었고, 漢의 법률이 일률적으로 적용되지 못하고 고유한 습속에 의한 질서가 유지됨으로써, 이른바 ‘故俗’에 의한 ‘自治’가 전개되었다. 즉 漢代의 邊郡이란 형식적으로는 직접적, 개별적 지배가 관철되는 지역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간접적, 집단적 지배가 불가피했던 곳이었으니, 帝國 지향적인 이상과 非帝國的인 현실이 공존하는 모순의 공간이었다. 邊郡 체제, 즉 염철 논쟁 이후에 漢人이 선택한 변군 지배 체제는 이후 漢代 일대를 통해, 나아가서는 전통 시대를 관통하면서 내내 중국인들이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제3의 길이었다.
漢代 이후에도 中國의 바깥에는 漢代 邊郡과 같은 모순적 공간이 항상 존재하고 있었다. 예컨대, 唐代에 羈縻府州가 설치된 곳이나 明, 淸 시대에 土司가 설치된 곳은 中國이 아니라 夷狄의 공간이었고, 郡縣制가 관철되지 못하고 그 대신 冊封-朝貢 체제가 작동하고 있었다. 帝國이 성립되어 중국을 지배하였던 전통시대에는 언제나 제국의 영역과 중국의 범주 사이에 이와 같이 제국의 이상과 현실이 공존하는 모순의 공간이 상존하였는데, 이러한 현상의 기원은 漢代의 邊郡에서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