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사르키는 더 진화적 인간…‘전시’될 사람은 그녀가 아닌 영국·프랑스인
▲ 플라밍고의 미소…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 김명주 옮김 | 현암사 | 611쪽 | 2만8000원
앨프리드 킨제이, 사르키 바트만 그리고 올리버 웬들 홈스는 서로 어떠한 접점도 공유하고 있지 않지만, 모두 스티븐 제이 굴드의 생물학 에세이 <플라밍고의 미소>에 등장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이 세사람에 대한 일반적인 인상은 이 책에서 충격적으로 전복된다. 이들은 무슨 연유로 이 유명한 생물학 에세이에 이름을 올렸을까?
‘킨제이 보고서’로 유명한 킨제이는 가장 주목할 만한 혹벌 분류학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대학의 성교육 강좌를 담당하면서 전공을 바꾼다. 그는 성 연구소를 설립하고 기금을 확보해 광범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렇게 출간한 게 두 권의 대작 <인간 남성의 성 행동>(1948)과 <인간 여성의 성 행동>(1953)이다. 킨제이는 곤충 연구를 통해 변이는 우발적인 일탈이 아니라 자연의 근본적인 실재라고 하는 반본질주의적인 사고방식을 확립했다. 인간의 성을 이성애자와 동성애자의 두 집단으로 분명하게 구분할 수 없다고 하는 반본질주의적인 견해에 입각한 킨제이의 성 연구는 그 연장선상에 위치하는 것이었다. 킨제이에게 “생명의 세계는 모든 측면이 연속적”인 것이었다. 킨제이는 인간 윤리를 땅에 떨어뜨린 주범이 결코 아니었다.
‘호텐토트의 비너스’(세례명 사르키 바트만)로 잘 알려진 한 흑인여성은 19세기 초반 서구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인간 전시’의 사례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둘을 합쳐 코이산족이라고 불리는 호텐토트족과 부시족은 ‘하등동물에 가장 근접한 인간’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사르키가 누린 ‘인기’는 두 부분의 성적 부위 때문이었다. 주목을 끈 한 부위는 둔부에 축적된 지방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성 생식기에 붙어있는 ‘수치의 장막’이었다. 과도하게 큰 생식기는 그녀가 동물적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지표로 여겨졌다. 그러나 인간은 영장류 가운데서 성적으로 가장 적극적이고 생식기도 가장 크다. 따라서 평균보다 큰 생식기를 가진 사람은 그만큼 더 인간적인 것이 된다. 이런 점에서 런던과 파리가 거대한 우리 안에 서 있고 사르키가 그것을 지켜봤어야 한다는 게 굴드의 결론이다.
1812년 프랑스에서 발표된 ‘호텐토트(사르키 바트만)의 비너스’에 매혹된 영국인을 풍자하는 그림이다. 굴드는 당시 사르키를 이용하고, 억압하는 것을 비판한다. | 현암사 제공
홈스는 소수자의 권리를 자주 옹호했던 미국의 전설적인 대법관이다. 20세기 초 미국에서는 인종구분에 기반을 둬 국가별로 이민 쿼터를 정한 ‘이민제한법’과, 생물학적으로 부적격한 사람을 대상으로 우생학적 불임수술을 강제할 수 있는 법이 시행됐다. ‘가치 없는 10분의 1’의 유전자를 제거할 것을 희망한 미국 우생학 운동에 가장 열렬하게 반응한 것은 나치 독일이었다.
그러나 홈스 대법관 역시 1927년 미국 대법원의 ‘벅 대 벨 재판’에서 불임수술 법안을 지지하였다. “누가 봐도 부적격한 사람이 같은 종류의 자손을 존속시키지 못하게 사회가 막을 수 있다면 세계 전체로서는 더 좋은 일이다”라고 홈스는 썼다. 그리고 굴드에 따르면 그 재판에서 인정된 강제적 불임수술은 명백한 거짓을 바탕으로 공인된 것이었다고 한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대중적인 글쓰기에 능한 진화생물학자이자 고생물학자다. <시간의 화살, 시간의 순환>(아카넷) 등 이미 번역된 여러 권의 저서로 한국 대중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연구자다. 다작의 굴드는 300여편의 ‘자연학 에세이’를 남겼는데, 1974년부터 2001년까지 27년 동안 매월 미국 자연사박물관에서 발간하는 ‘내추럴 히스토리’에 연재한 것이다. 이번에 나온 이 책은 그 중에서 30개의 에세이를 추려 네 번째로 발간한 것이라고 한다.
진화생물학자로서 굴드는 다음 세 가지를 모토로 내걸고 있었다. 첫째, “평형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는 ‘단속평형설’을 주장한 것으로서, 점진적 진화만이 진화의 유일한 현실이 아니며 다른 단속적인 현상 역시 중요하다는 점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둘째, “포유류는 공룡과 함께 진화했다”. 진화는 필연적인 향상과정 곧 진보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진화가 진보주의로 편향하는 것을 항상 경계했다. 셋째, “인간의 평등은 역사의 우연적 사실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역사적으로 매우 어린 종이고, 심지어 여러 인종으로 나뉜 것은 더 최근의 일이다. 여기에는 인간의 변이에 대한 근본적인 견해가 잘 드러나 있다.
이 세 가지 문제의식이 각각의 에세이에서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지만, 의미 맥락의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사회적 성찰성’인 듯싶다. 굴드는 과학을 그저 과학만의 세계에 가두지 않고 과학과 사회 사이의 관계를 폭넓게 성찰한다.
팁 하나, 14번째 에세이 ‘양극단의 소멸’은 그 유명한 ‘4할타자의 절멸’을 다룬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미 ‘백인천 프로젝트’로 실증이 시도된 적이 있다.
팁 둘, 21번째 ‘싱가포르의 세습재산(과 결혼)’은 상위계급에게 노골적으로 우선권을 부여하는 리콴유 총리의 결혼 프로젝트가 잘못된 생물학 지식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바, 타산지석으로 삼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